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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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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 4대재녀
2014년 03월 02일 18시 10분  조회:6464  추천:5  작성자: 넉두리

중국고대 4대재녀

 


 

중국력사에서는 채문희, 리청조, 탁문군, 상관완아를 중국고대 4대재녀(才女)라고 일컽는다.



 
기구한 운명을 헤쳐온 채문희

채문희(蔡文姬)는 후한3국시기의 저명한 문학가로서 이름이 염(琰)이고 자가 문희 또는 명희이다. 채문희의 아버지 채옹은 그 당시 이름 높은 학자, 문학기재로서 음률에 정통하고 서예와 회화에 아주 능하였다. 채문희는 아버지 영향을 받아 거문고를 잘 타고 지식이 풍부했으며 타고난 문학적재질을 가지고있었다. 아버지가 거문고를 타다 선이 끊어지면 몇번째 선이 끊어진것을 눈을 감고도 찾아내는 등 천부적인 음악재질을 타고났다.
채문희는 16세 때 하동의 세족인 위중도와 결혼하여 부부금실은 좋았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이 1년만에 각혈로 죽었다. 시댁에서는 그녀가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구박했다. 채문희는 하는수없이 본가로 돌아와 살았다. 그후 아버지 채옹은 감옥에서 숨지고 채문희는 홀로 살았다. 그 무렵 권력다툼으로 인해 동한북부의 유목민족 흉노가 남부로 쳐들어 와는데 그때 채문희도 랍치되였다. 흉노의 좌현왕은 절세미녀 채문희에게 반하여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채문희는 좌현왕의 왕비가 되여 2명의 자녀를 낳고 현지음악까지 배웠다.
건안13년(208년)에 채옹의 친구였던 조조는 채문희가 흉노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주근을 사자로 보내여 황금 천냥, 백벽 한쌍을 주고 채문희를 데려왔다. 그해 35세였던 채문희는 조조의 중매로 전교위 동사한테 시집을 갔다. 2년후 동사는 죽을죄를 범했는데 채문희는 조조의 승상부를 찾아가서 남편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조조는 채옹과의 옛정을 생각하고 또 친구딸의 비참한 신세를 보고 동사를 죽이지 않았다. 채문희는 동사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은데 딸은 후에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에게 시집을 갔다.
채문희는 일생에 세번 시집을 갔는데 운명이 기구했다. 그녀는 명문가문에 태여났지만 평생 류랑생활을 하였으며 그녀의 작품은 이 비분과 슬픔속에서 만들어 졌다. 그의 창작 작품 호가18박자와 비분시는 채문희의 비참한 조우에서 비롯 된 것이다. 채문희는 사람의 애간장을 끊게 하는 거문고곡 《호가18박(胡笳十八拍)》을 창작했고 동사가 죽은후 저명한 《비분시(悲愤诗)》를 창작하여 남편을 기렸다. 《호가18박》은 중국 고대 10대 명곡이고 《비분시》는 중국 력사상 첫 장편서사시이다.
 
 
남송의 걸출한 녀류작가 리청조


리청조(李清照)는1084년 3월 13일에 장구(지금의 산동성 제남)에서 출생했는데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이다. 남송의 걸출한 사인(词人)인 그녀는 18살 때 우승상의 아들 조명성과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금슬이 좋았는데 함께 금석서화를 연구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어느해 중양절에 리청조는 저명한 《취화음》을 써서 외지에서 벼슬하고있는 남편에게 부쳐주었다. 그 사를 본 조명성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문을 닫고 래방객을 사절하며 밤낮 사흘동안 침식을 잃으면서 답사를 써보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 1127년에 북방녀진족(금)이 쳐들어오자 리청조부부는 난민들을 따라 강남으로 피난을 가게 되였다. 그때 오래 모아두었던 금석서화를 대부분 잃어버린 리청조를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후 남편이 사망되자 리청조는 몹시 고독했다. 그 시기 그녀의 생활에 장여주란 남자가 뛰여들었다. 장여주는 리청조를 돈 많은 녀자로 알고 그녀한테 접근하여 달콤한 말로 유혹했다. 리청조는 장여주를 다정다감한 남자로 알고 그한테 시집을 갔다. 결혼후 장여주는 리청조에게 재산이 많지 않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리청조도 장여주의 사랑이 거짓이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장여주의 관직이 돈을 주고 사온것임을 발견한 리청조는 남편을 고발했다. 당시에는 남편에게 죄가 있으면 안해도 함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리청조의 부모가 옥졸을 매수하여 리청조는 9일만에 감옥에서 나올수 있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리청조의 두번째 혼인은 100일도 못되여 결속되고말았다.
리청조는 남편 조명성의 뜻을 잇기 위해 《금석록》을 편찬했다. 리청조는 《여몽령》, 《일전매》, 《영우락》, 《어가오》, 《무릉춘》 등 예술성이 높은 사작품을 세상에 남겨놓고 1155년 5월 12일에 사망되였다.
1959년에 제남시 박돌천공원에 리청조기념당을 세워는데 1999년에 대규모로 확건했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당조의 최고 재녀 상관완아

664년에 섬주(지금의 하남성)에서 태여난 상관완아(上官婉儿)는 용모가 아름답고 요염한데다가 남달리 총명하고 영특했다. 또한 문체가 뛰여나 한번 붓을 들어 글을 쓰면 문장이나 글씨체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상관완아의 할아버지 상관의는 섬세한 기교를 구사한 시풍인 상관체를 류행시키며 당태종때부터 널리 이름을 떨쳤고 당고종때에는 재상으로 되였지만 무측천의 페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였다. 상관의의 가족도 모두 처형되였지만 갓난아기였던 상관완아와 어머니 정씨만은 외가쪽의 도움으로 살아남을수 있었다.
상관완아는 할아버지 상관의의 재능을 물려받아 시문에 능하고 천성이 총명했다. 그녀는 14살 때 궁의 노비로 들어가게 되였다. 무측천은 상관완아가 쓴 7언률시를 보고 글솜씨에 감탄하여 그녀를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비서로 삼았다. 그때로부터 상관완아는 무측천에 대한 복수심을 버리고 녀황제를 도와주었다. 그후 상관완아는 당대문화가 번성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무측천의 최측근으로  된 상관완아는 696년부터 조서를 담당하는 일을 맡아하면서 큰 권세를 누렸다. 상관완아는 시적 재능만 뛰여난것이 아니라 정치적 수단도 뛰여나 무측천의 조카인 무삼사와 애매한 관계로 가까이 지냈으며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된 중종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중종이 복위를 한 뒤에도 중종과 위황후의 신뢰를 받은 그녀는 황제의 명을 전담하며 대부분의 조칙을 꾸미였다. 그녀는 중종의 후궁으로서 소용(昭容)의 지위에 올랐으며 위황후와 무삼사 등과 련합하여 무측천때의 중신들과 무씨세력이 회복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종에게 서관과 학사를 늘일것을 건의하고 조정을 대신하여 천하의 시문을 품평하였다.
710년에 중종이 죽고 위황후가 무측천처럼 스스로 황위에 오르려 하자 상관완아는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와 련합하여 이를 견제하였다. 결국 리륭기가 태평공주와 힘을 합하여 위황후를 제거하고 아버지 리단(당예종을 말하는데 황제에 올랐으나 어머니 무측천이 녀황제로 되자 태자로 강등되였음)을 다시 황제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리륭기는 상관완아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주변의 상관완아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리륭기는 710년에 상관완아를 처형하였다. 향년 46세였다.
그후 당현종이 된 리륭기는 상관완아의 글들을 모아서 20권의 문집으로 편찬하였다. 당시를 모아 편찬한 《전당시(全唐诗》에도 상관완아의 시 32수가 실려있다.
 


 
아름다운 사랑신화를 엮은 재녀 탁문군

탁문군(卓文君)은 서한시기의 림공(지금의 사천성 공래시)사람인데 미모가 뛰여나고 거문고와 문장에 능했으며 가문이 부유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탁문군은 박학다식하여 시가사부(诗歌词赋), 음률 등 어느것 하나 정통하지 않은것이 없었다.
탁문군은 17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여 친정에 와서 살았는데 숱한 명문가문에서 그녀한테 청혼하였다. 하지만 탁문군은 가난한 서생인 사마상여한테 마음을 주었다. 탁문군은 거문고를 잘 타고 시에 능한 사마상여의 재능에 반하여 그를 사랑하게 되였다.
탁문군의 아버지 탁왕손은 딸이 가난한 사마상여와 만나는것을 반대했다. 그러자 탁문군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도와 도주했다. 그때로부터 탁문군은 주점을 차려놓고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사랑과 행복을 위해 밤도와 도주한 탁문군의 비범한 용기와 그들의 랑만적인 애정이야기는 후세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얼마후 탁왕손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에 딸한테 거금을 대주어 주점을 그만두게 했다.
그후 사마상여는 경성에 들어가 벼슬하게 되자 기생집에 드나들고 첩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면서 환난을 함께 겪었던 안해를 버리려고 했다. 사마상여는 안해한테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백천만”이란 13자 되는 편지를 보내왔다. 총명한 탁문군은 수자중에서 유독 “억(亿)”이 빠진걸 보고 “무억(无亿)”은 “무의(无意)를 암시한다는것을 알아차렸다. 탁문군은 눈물을 흘리면서 《원랑시》를 써보냈는데 그 시를 받아본 사마상여는 안해의 재주에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행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후부터 사마상여는 다시는 안해를 버리고 첩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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